“”” 네 적을 사랑하라. 그것이 적의 신경을 거스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 86p, 〈충고〉
배우들은 불의에 맞서 분노하는 시늉을 할 줄 알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랑하는 시늉을 해서 사람들의 굄을 받으며, 행복한 모습을 연기할 줄 알기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배우들은 이제 모든 직업에 침투하고 있다.
198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것은 배우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고명(高明)한 사상이라든가 통치 능력 따위는 쓸모가 없어지고, 연설문을 작성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거느리고 카메라 앞에서 멋진 연기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이 온 것이다.
사실, 현대의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들은 더이상 정강 정책에 따라서 후보를 선택하지 않는다.(누구나 선거 공약이 종당엔 공약(空約)이 되고 말리라는 것은 뻔히 알고 있다. 현대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정당과 정파의 지혜를 다 합쳐도 모자란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유권자들은 생김새와 미소, 음성, 옷맵시, 인터뷰할 때의 격식을 차리지 않는 태도, 재치 있는 언변 따위로 후보자를 선택한다.
직업의 모든 분야에서 배우 같은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우위를 점해 가고 있다. 연기를 잘 하는 화가는 단색의 화폭을 갖다 놓고도 예술 작품이라고 설득할 수 있고, 연기력 좋은 가수는 시원찮은 목소리를 가지고도 그럴듯한 뮤직 비디오를 만들어 낸다. 한마디로, 배우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배우들이 우위를 차지하다 보니,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해지고 겉치레가 실속을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말하는가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떻게 말하는지, 말할 때 눈길을 어디에 두는지, 넥타이와 웃옷 호주머니에 꽂힌 장식 손수건이 잘 어울리는지 따위를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하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토론에서 점차 배제되어 가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 96p,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다〉 “””
요즘 밤샘->외근->집에서 잠만 자고->또외근->밤샘 이런 루프를 돌고 있어서 시간이 전혀 안 나는군요. 흐흑. 메일 읽을 시간도 없고 엉엉. ㅠ.ㅠ
그래서 요즘은 출퇴근하면서 지난번에 읽었던 《나무》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호감이 생겨서, 이번에는 1993년에 나왔다가 2003년에 증보된 베르베르의 상식 사전인 《쥐의 똥구멍을 꿰멘 여공》을 읽고 있습니다. 흐흐.. 재미있네요.. 또 회의하러 가야해서 이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