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에서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아!!” (수화로는
검지만 펴서 입에 대고 앞으로;;) 하며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낸 책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도덕 교육의 파시즘》 (ISBN 8987671410) 입니다.
한 철학교수가 여러 도덕교사 모임에서 한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인데, TV에서 보자마자 바로 충동적으로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
이 책에서는, 한국의 초등/중학교 도덕 교과 교육은 도덕적인 사람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라기 보다는, 권력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노예를
강요하는 것을 교과의 깊숙한 곳부터 깔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실제 교육 현장의
교사들은 교과서와 교육 지침에 따르지 않고, 원하지 않게 지나치게
창의적인 강의를 해야하거나 엉뚱한 다른 용도로 전용되는 것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도덕교과는 사회적인 규율과
규범들을 왜 그래야 하는지, 그렇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채, 곳곳에서 단지 열심히 권력자의 눈치를 봐서 덤비지 말고
잘 살라는 것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강요들로 넘쳐다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책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 두 개만 인용해 보자면,
삶의 보람을 말하든 자아실현을 말하든 결론은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도덕 교과서는 끊임없이 “공동체의 발전과 복지증진에 기여”하는 것이
올바른 자아실현이며, 보람 있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들을 언제라도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야말로 도덕 교과서가 가르치는 도덕의 존재이유이다.
— 책 p.32에서
한국의 도덕 교과서는 자기가 타인이나 사회에 대해 행할 수 있는 악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말하면서도 타인이나 사회 또는 국가가 개인에게
가할 수 있는 악에 저항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중략) 그런데 한국에서 예절이란 처음부터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규범이다. (중략) 이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제도화한다. (중략) 현실적으로
정착되어 있는 불평등한 사회관계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뿐만 아니라 위에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 역시 학생들이
배울 필요가 있다. (중략) 도덕교육은 사회적 약제에게 예절을
강요하는 만큼, 사회적 강자의 폭력과 횡포에 대해 어떻게 자기를
지켜야 할지도 말해주어야 한다.
— 책 p.36에서
그래서, 결국은 도덕 교육은 과거 군부정권 시대의 노예화 교육의 도구로
사용되던 것이 이제는 일반인들의 상식에까지 침투하여, 이제는 개인의
국가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나 권위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 등을
보고 감동을 할 정도까지 전개가 돼서 결국은 최근 H교수 사태에서
말도 안 되는 국익론까지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그동안 도덕 교과서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비슷한 사례를 보고서는
평소에 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요즘 TV에 나오는 것으로는
조그만 꼬마 여자애가 여기저기 난로를 켜고 온기를 쬐고 있는 어른들을
따라다니면서 “꺼주세요”하고 지나가는 광고가 있습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행동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을 강요하는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깔립니다. 이 광고를 되새김해 보면, 전혀 낭비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온기를 아끼려고 난로에 붙어있다던지 난로를 쓰는데
있어서 적당한 사용이라고 생각되는 것조차도 무작정 끄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전혀 공감을 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낭비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 혼란을 주며 모든 국민을 나쁜 사람으로 몰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례로 KTF광고 중에서 사람도 없는 지하철에서 “나 지하철이거든?
좀 있다가 전화할게”라고 하는 것도 있고.. 흐흐.. 그 외에도, 제가 아주
싫어하는 TV 프로그램으로 “만원의 행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래도 소득이 많은 측에 속하는 연예인들이 나와서
1만원으로 주로 먹을 것 같은 생활에 꼭 필요한 곳의 지출을 비상식적으로
아끼면서 1주일을 지내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을 꿈꾸며 진행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정상적인 생활로 소비를 줄이는 것은 실현도 불가능하고 제대로 된 절약의
기준을 흐릴 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먹을 것을 아껴서 나중에
비싼 것에 쓴다는 식의 의식을 심어줄 수도 있어서 기초 소비재 내수 시장을
위축시키고, 부동산이나 외산 제품같은 것을 사는 것이 도덕적으로 더
옳은 일인냥 무의식 속에서 국민들을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것입니다.
90년대 초반에 이경규가 나와서 한밤중에 차도 사람도 거의 다니지 않는
밝은 곳에서 차선에 딱 맞춰서 서면, “우와~~” 하면서 칭송을 하며
가서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그런 포맷의 전성기라고
생각됩니다. 신호등의 존재 목적은 신호등을 지키기 위한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람과 자동차를 사고 없이 통행시키기 위한 것인데,
목적을 잊어버린채 맹목적으로 사람이 다니던 말던 칼같이 지키는 것을
강요하며,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당위성 없이 국민들의
무의식에 그런 것들을 주입시켜왔습니다. 오락 프로그램으로써 어쩔
수 없었겠지만, 지켰을 때와 안 지켰을 때의 시험/심리학적 비교를
해 보고, 밤에 통행할 때는 서행을 한다던지 등의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이 관련된 책의 부분을 하나 인용하면,
유감스럽게도 법은 완전한 균형과 공정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
설령 어느 순간에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권력관계는 언제나 변하는 까닭에 법이 지향하는 균형과 공정성이 언제나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정당한 법을 마땅히 지켜야 하겠지만 법 자체를 절대시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된다.
– 책 p.296
그동안 우리나라는 개화기-일제시대-군부정권의 흐름 때문에, 언론이나
정치인 등의 권력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항상 국민을 계몽하려고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언론사들은 거의 통계용으로 가입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까지 드는 OECD 통계 자료를 인용하여 국민들의 도덕이 해이해지고
있다며 항상 뭔가를 시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통계청 자료를 이용해
거의 대부분 언론의 헤드라인에 오른
한국인 책값지출 거의 ‘제로’ 수준이라는
기사는 여기저기 비주얼한 자료가 가미되고 숫자로 채워져 있지만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요새 니들 책을 안 읽으니 앞으로 많이 사서 읽어라.”라는
단 한 마디에 불과합니다. 국민들이 책을 안 사는 이유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흐름을 분석해서 영향을 미친 것들을 고치던지,
대상인 국민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감화를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캠페인을 하는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이
무작정 국민들을 비난하며 계몽하려는 시도보다는 훨씬 결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국민들”이라는 대상은 일단 개체의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무슨 일에는 이유가 있고 그에 대한 이유가
논리적이라면 결과가 전통적 도덕에 옳지 않더라도, 흐름을 바꾸려면
양의학적인 결과 바꾸기보다는, 한의학에서와 같이 원인을 통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고 있는 만큼 이제는
확실하게 “계몽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할 수 있겠습니다. 각자의 마음 속의
도덕은 이제 “~해야 한다”로 끝나는 말들로 가득찬 기억이 아닌,
“그래서 나는 ~한다”라는 식의 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창의적인 지식인이 필요한 시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월화수목금금금하면서 교수들에 대해 주입된 예절과 복종을 강요받는
시대에 대한 자성이 이제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
우리나라도 “근면-자조-협동”이 지배하는 부품으로써의 개미 사회에서
충분히 벗어나고 있지 않은가 하고 희망을 가져 봅니다. 🙂
(참고: 이 책은 소수의견에 속하는 편이며, 다른 윤리교육학자들의 논리적인 반론들도 여럿이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하셔서 반론들도 같이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